역사학자 신채호 선생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라고 했습니다. 역사를 알아야 미래가 보입니다.
한국의 기독교인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나라와 민족을 사랑합니다. 다른 나라와는 달리 스스로 기독교를 수용한 한국 기독교인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자기 나라를 사랑했습니다. 그들의 나라사랑은 한국 사회를 변화시키기도 했고 국권을 수호하고 잃어버린 국권을 되찾는 데 앞장서기도 했습니다. 나라사랑의 본질은 같았지만 나라사랑의 방식과 표현은 시대마다 달랐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그 시대가 갖고 있는 사명에 얼마나 충실했느냐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국 기독교인의 나라사랑을 그 시대가 안고 있는 시대적인 과제와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 과제란, 수용당시에는 중세사회의 전통적인 유습을 개혁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한말에는 외세의 침탈에 대항하여 국권을 수호하는 것이었으며, 일제 강점 하에서는 국권회복·민족독립이라는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었습니다. 해방 후에는 식민지적 유제 청산을 비롯하여 민족적 전통의 창조적 회복과 통일된 민주국가의 건설 등 중층적인 과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해방 초기의 식민지잔재의 청산이라는 민족적인 과제는 독재, 군사 정권 아래서는 인권 신장, 민주화의 과제로 발전되었으며, 분단이 민족공동체의 제반 사회적 조건들을 제약한다는 것을 통절하게 깨달았을 때에는 무엇보다 통일국가의 실현이 가장 뚜렷한 민족사의 과제로 부각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적 과제는 민족구성원으로서 뿐만 아니라 기독교와 기독교인에게도 당연히 주어진 과제였습니다.
“한말 사회개혁 운동” 한말 봉건사회의 모순은 이미 조선 후기부터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1811년 홍경래의 난을 필두로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민란’들은 봉건사회의 실정과 모순들의 필연적인 결과물이었습니다. 매관매직으로 인해 인사상의 난맥과 삼정의 문란이 극도에 달하여 철종 조에 들어서는 임술년(1862) 한 해 동안에 37건의 ‘민란’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대원군이 등장하여 세도정치로 땅에 떨어진 조선왕조의 권위를 재건하고자 일종의 개혁정치를 과감하게 실천한 것은 이 때문이었습니다. 대원군의 몰락과 함께 왕비족인 여흥 민씨에 의한 세도정치가 둥지를 틀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사회에나 한 파당의 전횡이 있는 곳에 독재나 부패가 만연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시의 관리들의 부패가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독립신문의 기사입니다. “혁파하라신 잡세를 여전히 무는 것은 관장들의 탐학하는 까닭이요, 돈 많은 부자들을 무단히 불효부제(不孝不悌)한다고 잡아가두는 것은 그 부자가 다른 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돈 모은 것이 죄가 됨이요 한 동리 사람은 아무가 불효부제인줄 모르되 먼 데 있는 관찰사와 군수들이 먼저 아는 것은 그 관원들이 다른 탁이한 문견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주사야탁(晝思夜度)이 다만 돈 먹을 생각뿐인 고로 동 녹슬 밝은 눈이 먼 데 있는 돈구멍을 능히 밝게 봄이라.”
기독교가 한국 사회의 개혁에 미친 중요한 것 중 하나는 기독교적 인간관이 주는 영향입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기독교적 인간관은 인간의 존엄성과 천부적인 인권을 담보해주었고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다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서울의 승동교회에서는 백정 출신의 박성춘이 장로가 되었고, 그의 아들 박서양은 세브란스 1회 졸업생이 되어 한 때는 모교에서 가르치기까지 했습니다. 기독교는 직업관과 가치관을 변화시켰습니다. 반상의 차이를 극복하는 동시에 직업관도 바뀌어졌고, 봉사와 희생을 기독교적 실천덕목으로 강조했습니다.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남을 섬기는 자가 되라’는 예수님의 교훈은 배재학당의 당훈이 되었고 이를 교훈 받은 자들이 섬겼던 한국 사회의 가치관을 개혁하는 데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특히 의료선교사들의 콜레라 퇴치를 위한 헌신 봉사는 한국인들의 기독교에 대한 편견은 물론 직업관과 가치관을 변화시켰습니다. 한말 기독교인들은 부정과 부패에 항거하는 능력을 배양해 갔습니다. 기독교인들의 부정부패에 대한 항거는 오로지 복종만 강요당해 온 백성들의 자각 없이는 불가능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백성들은 관장으로부터 생명과 재산을 보호받기 위해서도 기독교에 입교하는 경우가 더러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관장의 말을 믿다가는 큰 낭패를 보겠으니 다시는 관장의 말을 믿지 말고 외국교에나 들어가서 생명과 재산을 보호받자고 했는데, 황성신문이 백성들이 외국교에 떼 지어 들어가는 것은 관리들의 탐학에 고통 받아 그 화망을 피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한말에 기독교가 수용되어 교회가 세워지는 곳에서 전통적인 종교나 사상에 의한 갈등이 적지 않게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지방 수령 중에는 부정에 항거하는 기독교인들을 ‘동학교도’라는 혐의를 뒤집어 씌워 투옥시키기도 했지만 부정부패한 지방관들 중에는 부정을 고발하는 기독교도들의 항거 때문에 지방수령으로 발령받은 일부 양반들은 야소교 있는 마을에는 부임하지 않겠다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이번에 새로 난 북도 군수 중에 어떤 유력한 양반 한 분이 말하되 예수교 있는 고을에 갈 수 없으니, 영남 고을로 옮겨 달란다하니 어찌하여 예수교 있는 고을에 갈 수 없느뇨. 우리 교는 하나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도라, 교를 참 믿는 사람은 어찌 추호나 그른 일을 행하며 관장의 영을 거역하리요. 그러나 관장이 만약 무단히 백성의 재물을 뺏을 지경이면 그것은 용히 빼앗기지 아닐 터이니 그 양반의 갈 수 없다는 말이 이 까닭인 듯…”
“항일 국권수호 운동” 반봉건, 사회개혁 운동은 상황에 따라서는 반외세, 국가자주 운동으로 나타나게 된다. 양자는 표리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이 반봉건운동에 나서게 되는 때가 1890년대 후반인데 바로 그 무렵부터 기독교인들의 국가자주운동도 함께 보이기 시작했다. 기독교인들은 1896년경부터 우선 왕의 탄신일을 맞아 그것을 축하하는 모임을 가지면서 충군 애국운동을 벌이는가 하면, 독립협회와 협성회에 참석하여 민권신장을 통한 국가자주독립운동에 앞장서게 되었다. 독립협회 운동은 기독교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진행되었는데, 그것은 지도부(윤치호, 서재필)를 비롯하여 중간지도층(남궁억·이상재는 아직 기독교에 입교하지는 않았으나 뒷날 기독교에 입교하게 된다. 그 밖에 주시경, 이승만 등)과 대중 동원 층에 기독교인들이 다수 포진하고 있었다. 배재학당의 학생회인 협성회에도 기독교 인재들이 많이 모였다. 만민공동회에는 백정 출신의 박성춘이 연설하는 것을 비롯하여 기독교인들의 참여가 적극적이었다. 노일전쟁에서 일제가 승리하고 일본의 배타적인 한국간섭이 노골화되어가자 기독교인들의 반외세 국가자주운동은 거의 항일운동으로 집약되었다. 한국교회의 항일운동은 종교적인 행위라고 할 기도회 등에서 나타났다. 일제 침략이 노골화하자 1905년 9월에 모인 제 5회 장로회공의회에서는 길선주 장로의 발의로 그해 11월 감사절 익일부터 7일간 전국교회가 나라를 위해 기도하기로 결정했다. 을사조약이 늑약된 후 정순만, 전덕기 등이 그 철폐를 위한 기도회를 상동교회에서 개최했을 때 연일 수천 명이 모였고, 순종 황제 서순 때에도 환영예식을 거행한 후 예배당에 회집해서 ‘나라위한 기도회’를 열었다. 이 때 평양 교회 김 장로의 증언에는 “교중에서 왕왕히 나라를 위하여 기도 한다”는 내용도 있었다. ‘나라 위한 기도회’의 전통은 그 뒤 1907년 평양 대 부흥운동 전후해서는 새벽기도회가 점차 활발하게 전개되어 뒤에 전국화 하게 되었다. (다음호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