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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3무(三無)의 축복!

2026-06-10 11:14 | 입력 : ad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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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석기 목사
홍석기 목사

신문 기사에서 ‘국내 최초 생존시 최다 장기 기증 4관왕 최정식’이라는 기사를 보았다. ‘최정식’ 목사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 분은 ‘예수님의 사랑, 예수님의 섬김’을 실천하기 위해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콩팥’을 하나 떼어주었다. 또 다른 모르는 이에게 ‘간’의 반을 떼어주었다. 또 다른 모르는 이에게는 ‘골수’를 기증했다. 1993년 신장기증, 2003년 간기증, 2005년 골수기증을 했다. 이것도 모자라 자기 몸을 더 떼어주고 싶어서 ‘췌장’기증 등록까지 해 놓았다. 수혜자가 하루빨리 나타나기를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다는 기사였다. 아마 지금쯤 이미 기증을 받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국내에서 콩팥과 간을 동시에 기증한 이는 모두 25명이다. 그런데 골수까지 기증한 사람은 최 목사님이 유일하다고 한다. 헌혈을 무려 187회나 했다고 한다. 사후 시신 기증도 약속했고 조직 기증도 약속했다. “죽어서도 아낌없이 다 주는 삶을 실천하겠다”는 것이다. 특이한 점은 목사님이 30년째 하루 한 끼만 먹고 산다고 한다. 조금이라도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이다. 이 분이 이렇게 장기를 아낌없이 기증한 동기가 무엇일까? 하나님께 받은 사랑 때문이다. 주님께 받은 사랑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그래서 받은 사랑을 조금이라도 나누기 원하는 마음에서 장기 기증을 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 그래서 하나님께 가장 소중한 아들을 ‘화목 제물’로 우리에게 보내주신 것이다.

롬 8:31-35에 보면 ‘3무(三無)의 축복’이 나타나 있다. 첫째, 우리를 대적할 자가 없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하여 우리를 대적할 자가 없는 것이다. 대적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대적은 언제나 사방에 널려있다. 그러나 우리를 대적하여 넘어뜨릴 자가 없다는 것이다. 31절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했다. 질문하는 형식이지만 ‘대적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한 표현이다. 살다 보면 대적하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여러분의 대적은 누구인가? 직장 상사인가, 동료인가? 여러분을 괴롭히는 사람은 누구인가? 혹시 가까운 친구나, 가족은 아닌가? 최근에 오면서 ‘가족’으로 인한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형제에게 괴롭힘을 당한다. 배우자의 가족으로 인해 괴롭힘을 당한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남편이나 아내로 인해 괴롭다”는 사람도 적지 않다. “사람이 살아가는 사회에는 어디에나 괴로움의 요소가 있고, 대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들이 우리를 대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무리 대적하는 세력이 크다고 할지라도 ‘넘어뜨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둘째, 우리를 정죄할 자가 없다. 우리를 고발하거나, 송사할 자가 없다는 것이다. 33절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하였다. ‘고발한다’는 말은 법정 용어이다. 법원에 ‘송사한다. 고소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누구도 우리를 고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누구도 정죄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를 정죄하거나 고발하지 못할까?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모든 죄를 다 지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범한 모든 죄를 다 지시고, 죄의 값을 다 치르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치를 죄의 값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택하신 성도를 고발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실을 믿는 성도들이 때로는 ‘정죄’ 의식에 시달릴 때가 있다. ‘양심’에 가책이 올 때이다. 양심은 참으로 미묘한 존재이다. 아무도 보지 않고, 아무도 모르게 죄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양심은 그 사람을 가만 놔두지 않는다. 그 사람 속에서 말한다. “네가 나빠! 네가 잘못했어~ 그러고도 네가 목사야!” 양심에 가책이 오면, 정말이지 괴롭다. 양심의 가책을 견디지 못하면 자살을 택하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는 양심의 가책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 믿음은 양심의 가책을 뛰어 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우리의 양심을 이기기에 충분한 것이다. 예수님은 “너의 모든 죄를 다 사했다.”고 하시는데 왜 나는 아니라고 우기나? 그건 교만이고 불신이다.

세 번째,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자가 없다. 하나님이 우리를 붙드시기에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자가 없는 것이다. 35절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39절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누구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자가 없다는 뜻이다. 현대 사회를 가리켜 ‘윤기가 끊어진 시대’라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윤기’는 ‘사랑이 기초가 된 윤기’를 말한다. 사랑의 관계가 오래 가지 못한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이 말처럼 사람들과의 윤기가 오래 가지 못하는 것을 본다. 형제간의 윤기도 끊어지고.. 세상에서 가장 질기다고 할 수 있는 ‘부모와 자식 간의 윤기’도 오래 가지 못하는 것을 본다. 누군가 말하기를 “이제 겨우 남은 것은 부부간의 윤기뿐이다.”했다. 그렇다면 정말 부부간의 사랑이 그렇게 강하고 질긴 것일까? 사람에 따라 다를 것이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보면 많은 부부가 갈라서고 있다. “너 아니면 못 살겠다”며 결혼해 놓고 “너랑은 못 살겠다”며 이혼을 하고 있다. 인간의 사랑은 그리 믿을 만한 것이 못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다르다. 누구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 35절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환난, 곤고, 박해, 기근, 적신(헐벗음), 위험, 칼이라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우리는 마음이 자주 변하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랑을 지속하기에 무능하지만, 우리를 붙드시는 하나님은 능력이 무한하시기 때문이다. 변함이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길이 독자 여러분과 함께하심을 믿으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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