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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석기 목사 (상리교회, 범사회문제대책운동본부 사무총장) |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감정 중에 가장 고통스러운 감정이 무엇일까?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필자는 ‘버림받은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여러분도 혹시 버림받은 감정을 가져본 적이 있으신가? 어릴 때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친척에 의해 자라난 경우가 있다. 그런 사람의 경우 “부모가 나를 버렸다.”는 생각에 평생을 시달리게 된다. 자녀가 부모를 돌보지 않는 경우에는 “자녀에게 버림받았다”는 감정이 생겨난다. 또는 남편이나 아내에게 버림받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분명한 이유 없이 직장에서 해고된 경우도 그렇다. 직장에서 버림받았다는 감정이 생겨난다. 어떤 경우가 되었든지 ‘버림받은 감정’은 많은 고통을 수반한다. 우리나라에 아주 안 좋은 기류 중에 하나가 있다. ‘자살’하는 풍조이다. 이제는 “유명 연예인 아무개가 자살했다”해도 “그런가보다~”하며 무덤덤하게 지나간다. 왜 자살하는 것일까? 자살의 원인 중에 하나가 바로 ‘버림받은 감정’때문이다. 내가 버림받았다는 생각이 들면, 자신도 모르게 회의감이 밀려오며 ‘죽고 싶은 마음’이 든다. 버림받은 감정은 종종 극심한 ‘우울증’으로 이어진다. 우울증은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할 때 찾아온다. 그리고 버림받은 감정이 생겨나며 점차 우울증에 빠져든다.
우리 성도들도 예외가 아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이런 감정이 생겨날 수 있다. 오랜 세월 섬겨오던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심지어 예수님도 이런 감정으로 고통스러워하셨다. 십자가에 달리실 때 크게 소리 지르셨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며 얼마가 고통스러우셨는지 이런 절규를 하셨다. 이 고통의 소리는 시 22:1에 기록된 것을 인용한 것이다. 시 22편은 ‘다윗’이 기록했다. 다시 말해서 다윗도 하나님께 버림받는 고통을 겪었다는 뜻이다. 누구든지 이와 같은 고통을 당할 수 있다. ‘사업’이 뜻하지 않게 어려움을 당한다. 그런데 어디에서도 도움을 받을 수가 없다. 이대로 가면 망할 것 같다. 그러면 세상에 ‘나 혼자’라는 생각이 들며, 내적인 고통이 더해지는 것이다. ‘질병’으로 인하여 고통을 당할 때도 그렇다. 병이 치료되지 않고 장기간 계속될 때가 있다. 그러면 육신의 질병도 문제지만, 마음이 약해진다는 것이 더 큰 문제가 된다. 그러다가 신앙의 슬럼프에 빠진다. 처음부터 신앙의 슬럼프에 빠지지는 않는다. 어려움을 당하기 전까지는 하나님을 찾지 않다가 이제 하나님을 찾기 시작한다. 그런데 응답이 바로 나타나지 않는다. 주변의 상황이 더 힘들어진다. 그런 상태가 계속된다. 그러다가 문득 “하나님이 없는 거 아냐?”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이 살아있어도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어. 나는 하나님께 버림받았어..”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 ‘버림받은 감정’이 생겨나고 신앙의 슬럼프에 빠져드는 것이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럴 때는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낙심된 마음에 소망을 주시고, 다시 일어설 용기를 주시기 때문이다.
바울에게는 간절한 소원이 있었다. ‘이스라엘’이 구원받는 것이었다. 바울이 보니 이방인들은 복음을 잘 받아들였다. 이방인들은 예수님을 믿고, 세례받고 변화되었다. 하지만 자기 동족 유대인들은 마음이 강퍅했다. 복음을 전해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복음을 거부하며 전도자를 박해했다. 그러자 자기 동족을 생각하면 “내 동족이 하나님께 버림받지 않았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 롬 11장이 기록되었다. 하지만 롬 11장의 분명한 결론이 있다. “하나님은 결코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1절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여기 보시면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묻고 이어서 뭐라고 대답했나? “그럴 수 없느니라!”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엘리야’를 예로 들었다. 엘리야 시대에 이스라엘은 우상숭배가 만연했다. 아합왕과 이세벨 왕후가 바알신과 아세라 신상을 들여와서 이스라엘을 더럽혔다. 여호와를 섬기는 선지자들은 다 죽였고 온 땅에 바알 선지자들만 가득 찼다. 그러던 중에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바알,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전투를 벌였다. “누가 믿는 신이 최고의 신이며, 진짜 신인지 겨뤄보자!”고 했다. 그들은 갈멜산에 제단을 만들었다. 나무를 쌓고, 제물을 올려놓았다. 그 제물에 ‘불을 내리는 신’이 진짜라고 하며 먼저 바알 아세라 선지자들이 기도하게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없었다. 이제는 엘리야가 기도를 드렸다. 그 제단에 도랑을 파고 물을 흥건히 강처럼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하나님이여, 불을 내려 주옵소서!”하자 하늘에서 불이 내려 제물을 다 태워버렸다. 그러자 엘리야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기손 시내로 끌고 가서 모두 죽였다. 엄청난 일이었다. 엘리야는 두려울 게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놀라운 기적을 행한 후에 오히려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바알을 섬기던 여왕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엘리야가 왕후를 피해 도망갔다. 그러면서 몸은 지치고 의욕을 다 잃어버렸다. 마침내 하나님께 “차라리 나를 죽여달라.”고 간구했다. 그가 아주 심한 우울증에 빠진 것이다.
피곤에 지치고, 살아갈 용기를 잃은 엘리야에게 하나님이 주신 것은 ‘소망’이었다. 엘리야에게 남은 자 7,000명은 소망이었다. 그 어두운 시대에 아직도 믿음을 지키는 사람이 7,000명이나 된다는 사실은 엘리야에게 ‘희망의 빛’을 주었다. 그런데 그 7,000명 보다 더 큰 소망이 있었다. ‘하나님’이었다. 남은 자 7,000명이 없어도 하나님 한 분이면 얼마든지 흑암 속에서도 ‘빛’가운데 살아갈 수 있었다. 우리의 문제는 ‘남은 자’가 있고 없고가 아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있고 없고가 중요하다. ‘눈에 보이는 소망’이 있고 없고가 아니다. ‘예수님’이 내 속에 있고 없고가 중요하다. “하나님과 나와의 거리가 얼마나 가까운가!”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찾는 자에게 언제나 소망과 다시 일어설 용기를 주시기 때문이다. 독자 여러분도 하나님과 멀어진 거리를 좁히시고 산 소망과 용기를 가지고 다시 일어서시기를 소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