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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제1부 어머니는 바보야 49회

2026-10-21 17:06 | 입력 : ad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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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
윤기
전) 목포공생원 원장
공생복지재단 회장
- 1942년 목포 출생
- 중앙신학교(現 강남대학교) 사회사업학과를 졸
- 아동복지시설「목포공생원」의 원장
- 정신지체장애인시설「공생재활원」을 설립
- 한국사회복지사협회 부회장‧회장(1987年~2001年)을 역임
- 1989년 일본 최초의 재일동포를 위한 노인복지시설「고향의 집」을 건립
- 1978년 제22회 소파상등 수상다수
- 현재 일본 사회복지법인「마음의 가족」이사장
- 저서는《김치와 우메보시》, 역서는《괴짜총리 고이즈미, 흔들리는 일본》 《고령사회 이렇게 살아보세》

윤문지
공저자 윤문지(타우치 후미에)
-1949년 일본 오사카 출생
- 쿄토 도시샤(同志社)대학 사회복지학과를 졸
- 1972년, 한국 목포로 건너와 목포공생원 생활지도원 역임
- 현재 일본 사회복지법인「마음의 가족」 이사, 사회복지법인 윤학
자공생재단 이사, 사회복지법인 공생복지재단 이사장으로 활동,
-제3회 여성휴먼다큐멘터리 대상에《양이 한 마리》로 입선
- 1982년《나도 고아였다》로 일본 크리스천신문 제5회 아카시문학상 최우수상을 수상


어머니의 보답

도쿄에서의 일차 인사가 끝나자 우리는 오사카(大阪)로 발을 돌렸다.
언젠가 공생원 아이들을 위해 공업용 재봉틀을 기증해 준 적이 있는 야마모토(山本) 씨의 자택에 묵었다.
야마모토 씨는 한국인 촌이라 할 수 있을 만큼 교포가 많이 사는 이쿠노구(生野區)에서 작은 플라스틱 공장을 경영하고 있었다. 40평 정도의 건물 1층이 공장이고 2층은 자택이었다.
박애사(博愛社)를 방문하는 날이었다.
오사카의 히가시 요도가와(東徒川)를 건너자 쥬우소오(十三)라고 하는 번화가가 나왔다. 역 앞에서 칸자키바시(神崎橋)행 버스를 타고 두 번째 정류장에서 내리자 곧 낡은 교회당 꼭대기에 우뚝 솟아 있는 십자가가 우리들의 눈에 들어왔다.
한국에는 교회가 많아서 기차로 여행하다 보면 창밖으로 십자가가 곳곳에 세워져 있는 풍경을 목격하게 된다. 그러나 일본에서 십자가를 발견하기란 좀처럼 쉽지 않다.
메이지(明治) 23년, 기독교인 코바시 카츠노스케(小橋勝之助)가 설립한 이래 갖은 시련을 견디며 발전해 온 박애사는 작년 1965년으로 창립 75주년을 맞이했다. 5,560평의 넓은 대지 위에 세련된 현대풍의 5층 콘크리트 건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유아 홈도 근사했다.
어머니와 나는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황홀한 지경이었다.
“기(基)야, 공생원은 언제쯤 이런 훌륭한 건물을 지을 수 있을까?”
어머니는 부러운 눈으로 말씀하셨다.
“어머니 공생원도 창립 70주년쯤이면 이만한 시설로 성장해 있을 거예요. 그전에 아버지가 돌아오신다면 더 빨리 지을 수 있을 거고요.”
물론 어머니에게는 꿈같은 얘기였다.
“아버지가 돌아오신다면 별문제지만… 요원한 일이지.”
나는 아버지가 반드시 돌아오실 거라고 어머니에게 강조했다. 만약 돌아오시지 않는다면 내가 이 박애사처럼 70주년이 될 때까지 완성하고 말겠다고 약속했다.
어머니는 기뻐하며 행복한 얼굴을 지었다.
우리는 박애사의 나카가와(中川) 이사장을 만났다. 예순이 넘으신 온화한 성품의 이사장은 자신이 박애사에 관계하게 된 자초지종을 들려주시고 시설을 안내해 주셨다. 운영 면의 경험담도 구체적으로 들려주셨다. 나카가와 이사장의 이야기 속에는 적절한 충고도 많아서 나는 이것이 미래의 공생원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자신이 추구하던 것을 현실로 만난 기쁨에 가슴 설레며 숙소로 돌아왔다.
“어서 오십시오.”
야마모토 씨가 일손을 멈추고 맞아주었다.
“오늘은 좀 성과가 있으셨습니까? 기부라도 받으셨는지요?”
어머니가 조용히 대답하셨다.
“박애사에 다녀왔습니다.”
“박애사라뇨. 무슨 회사인데요?”
“회사가 아니고요. 공생원 같은 고아원이랍니다.”
“그런 덴 뭣하러 가셨습니까? 돈 들어올 일도 없을 텐데….”
야마모토 씨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아무리 돈 있는 사람이라도 ‘자, 이 돈 쓰십시오.’ 할 사람 있겠어요?”
어머니는 그저 미소로 대응하셨다. 야마모토 씨는 우리가 안타까워 견딜 수 없다는 태도였다.
우리가 서서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독일제 압축기는 쉼 없이 제품을 찍어대고 있었다. 숨돌릴 새도 없이 제품이 쏟아져나와 포장이 미처 따라가지 못했다. 포장에는 일손이 필요했지만, 일꾼이 부족해 매일 야간작업이 계속되고 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이 정도 일이라면 공생원 아이들도 충분히 해낼 수 있을 텐데.’
이곳에서는 일손이 부족하여 애를 먹고 있는 판에 공생원에서는 일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어 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태반이다. 내게는 가슴 저리는 일이었다.
찌는 듯한 더위가 계속되었다.
잠을 칭해도 잠이 오지 않는다. 아래층에서는 계속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나고 바람 한 점 없이 무덥기만 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여기가 공생원이라면 우물에라도 가서 시원한 물 한 바가지 퍼서 머리부터 끼얹으련만 남의 집 신세를 지는 처지에 그럴 수도 없고…. 밖에 나가보자, 조금은 낫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옷을 주워입고 계단을 내려갔다.
“어디 가느냐?”
공장 한구석에서 어머니 목소리가 났다.
나는 깜짝 놀라 소리 나는 쪽을 돌아보았다. 어머니가 직공들과 같이 작업을 하고 계시지 않은가!
나는 나도 모르게 힐책하는 말투로 고함을 쳤다.
“어머니! 여태 안 주무시고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
“글쎄 들어가 주무시라고 몇 번이나 말씀드려도 말을 안 들으세요.”
야마모토 씨 부인이 겸연쩍은 듯 말했다.
“공장 일이 이렇게 많은데 잠을 잘 수 있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도와줘야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도와줘야지’하는 어머니의 말이 나를 움찔하게 했다.
“어머니도 참, 저도 부르시지 않고….”
“너는 잠을 못 자면 다음 날 아무것도 못 하잖니?”
“어머니는요?”
“나는 괜찮다”
“하지만 어머니 몸도 생각하셔야죠.”
그리고 나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어머니, 어머니는 300명의 어머니란 말이에요.’

(다음 50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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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명 |2024.11.14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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