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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故춘곡 이남규 목사(양동제일교회)
- 한국 기독교장로회 제43회 총회장
- 목포연동교회 초대목사(1938년)
- 양동교회 13대(1945년), 16대(1952년) 담임목사 역임
- 제헌 국회의원과 초대 전남지사 참의원 활동
- 목포 영흥중고등학교 교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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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 이남규는 “교회는 사회 계몽과 변혁을 이끌어야 한다”라고 일관되게 주장하였다.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은 혁파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한 구약 시대의 선지자 아모스와 맥을 같이한다고나 할까? 그러나 이러한 이남규의 신학적 대전제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공간이라는 시대 상황으로 인해 잠시 뒷전으로 밀려난다. 따라서 이남규의 목회 활동은 일제강점기 하의 목회와 광복 이후의 목회가 서로 다른 형태로 나누어지게 되는 현실에 직면하게 된다.
이남규의 일제강점기 시대 목회의 주 목표는 “신앙 수호와 항일”이었다. 이남규가 이러한 목표를 갖게 된 배경에는 스승이자 동지였던 양동교회 박연세 목사의 영향이 컸다. 이남규 목회 주 목표의 하나인 “항일”의 실천은 1938년 연동교회 초대 목사로 취임하면서부터 시작된다. 이남규는 1944년 2월, 박연세 목사가 순교하기 전까지 “항일”을 통한 “신앙적 행보”를 같이한다. 두 사람의 투쟁 실천 방침은 “신사참배 거부”와 “일본 장로교”와의 통합 반대였다. 그러나 이러한 투쟁 결과는 두 사람이 감당하기 힘든 가혹한 것이었다. 박연세 목사는 후일에 “순교자”라는 면류관을 쓰게 되나 대구 형무소에서 동사라는 야만적인 악행을 겪으면서 소중한 목숨을 잃게 된다. 이남규는 1941년 일제에 의해 목사직에서 해임을 당하는 수모를 겪게 된다. 그리고 목포경찰서에 투옥되어 2년여의 옥고를 치르는 등 갖은 핍박과 고초를 겪게 된다. 이남규의 연동교회 목사 재임 기간은 불과 4년 남짓했지만, 이 시기는 일제의 탄압이 최고조에 이른 시기였다. 이러한 시기에 이남규는 스승이자 신앙적 동지인 박연세 목사와 함께 신앙 수호와 항일을 위한 목숨을 건 치열한 목회의 길을 걸었다.
- 광복 이후의 목회(양동교회 제13대 담임목사)
오직 너희는 먼저 그 분의 나라와 그 분의 의를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이 또한 너희에게 더하여질 것이다. -마태복은 6장 33절-
광복 이후의 이남규의 목회는 1945년 8월 25일, 양동교회 제13대 담임목사로 부임하면서부터 시작된다. 이 당시의 이남규의 목회는 한마디로 목회와 정치의 병행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남규가 목회와 정치를 병행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교회가 “사회계몽과 변혁”을 이끌어야 한다는 평소의 그의 목회철학에 따른 것이다. 우선, 이남규의 목회활동부터 들여다보자. 이남규의 목회는 우선 일제에 의해 훼손된 “교회의 재건”과 “노회 활동”을 주목표로 삼았으며, 또한 뛰어난 역량을 발휘하였다. 이남규가 일제하에서 침체되었던 교회를 재건하기 위해서 혼신의 힘을 쏟기 시작하자 많은 교인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특히, 박연세목사를 고발해 순교하게 한 사람과는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고 교회에 나오지 않은 채 가정에서 은밀히 예배를 드리던 성도들까지 교회로 차츰 돌아왔다. 이남규는 놀라운 지도력을 발휘해 교회를 안정화시켜가면서 상처 입은 교인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하고 영혼을 감싸주는데 게을리하지 않았다. 특히 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해 당시로서는 매우 진보적인 지도력으로 교회를 성장시켜 나간다. 그가 취한 대표적인 조치는 첫째, 적재적소에 인력을 배치 시키는 일, 둘째, 일꾼들을 당회에서 선출토록하고, 셋째, 안수집사제도의 도입등이었다. 이남규의 탁월한 지도력의 결과로 양동교회는 질적, 양적 성장을 거듭했다. 1년에 봄과 가을 두 차례에 나눠 학습과 세례 문답을 실시할 만큼 부흥되었다. 이남규의 이러한 새로운 리더쉽은 양동교회에 그치지 않고 전남노회재건과 총회 재건에도 발휘되었다. 한편으로는 “독립촉성회”를 조직하고 여러 애국청년들의 뜻에 따라 회장직을 맡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들과 더불어 해방공간의 무질서한 목포의 치안 질서 등을 잡는데 힘을 쓰기도 한다.
-전남노회 재건과 목포노회 분립
탁월한 지도력으로 양동교회를 질적, 양적으로 성장시킨 이남규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일제에 의해 붕괴된 전남노회를 재건키로 결심한다. 이남규의 주도로 일제에 의해 훼손된 전남노회는 1945년 11월 7일, 광주금정교회에서 열리게 되었다. 재건된 노회에서는 노회장에 김창국목사, 부노회장에 이남규목사, 서기에 성갑식목사, 부서기에 김병두목사, 회계에 선한권장로, 부회계에 서영범장로등이 지도부로 선출되어 전남노회의 새로운 틀이 재건되었다. 전남노회가 재건되고 2년여의 세월이 지나자 전남의 교세가 크게 신장되었다. 특히 목포를 중심으로한 서부지역의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다. 이에 목포지역의 일부교역자들이 더 큰 발전을 위해서는 전남노회와 목포노회를 분립하자는 주장을 제기하였다. 새로운 목포노회분립은 많은 어려움과 의견이 분분했다. 그러나 분립의견이 받아 들어져 1947년 4월에 열린 제33회 전국총회에서 전남노회로부터 목포노회를 분립키로 한다는 안이 가결되었다 총회의 결의에 의해 분립을 위한 새로운 목포노회는 이남규를 중심으로 5월 13일부터 17일까지 4일동안 목포양동교회에서 열렸다. 분립된 새로운 목포노회에서는 노회장에 이남규목사, 부노회장에 소집책임자였던 배영석목사가 선출되었다. 이로써 전남서부지역을 관활 하는 목포노회가 탄생되었다. 목포노회 초대회장직을 맡게 된 이남규는 이후로도 4번이나 전남노회장직을 맡게 된다. 이남규의 헌신적인 목회활동은 1952년 5월 양동교회 제16때 담임목사로 재청빙 되면서 계속된다.
-재청빙과 제16대 담임목사(양동교회)
이남규가 양동교회 제16대 담임목사로 재청빙 된 사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양동교회가 정식 당회장이 없이 임시 당회장(송암석목사)체제로 운영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는 제헌의원과 초대 전남지사직의 수행을 위해 교회를 떠났던 이남규가 1950년 5월30일에 실시된 제 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하고 서울과 목포를 오르내리며 특별히 하는 일 없이 지냈기 때문이다. 1952년 5월, 첫 주일 예배에서 설교를 시작함으로서 이남규의 두 번째 양동교회 목회가 시작된다. 그가 부임하자 “교회는 더욱 활성화되었고, 세례 및 학습자들이 대폭 증가했다. 그는 또한 교회 일꾼들을 세웠다. 그가 다시 부임한지 얼마 안 되어 양동교회 장로3인을 청원하게 되었다.” 이남규는 5월 25일 주일, 정기 당회에서 목회에 대한 세부계획을 발표한다. 세부계획안에는 눈길을 끄는 3가지의 주목할 만한 내용이 있다. 첫째, 당회의 고유권한인 재정문제, 전도문제, 심방문제, 집회문제 등을 각 기관에서 책임제로 관장할 수 있도록 대폭 이양한다. 둘째, 교회의 종을 이용해 교인들의 애경사를 적극적으로 관리하도록 한다. 교인중에 상을 당했을 경우는 종을 두 번 치고 쉬었다가, 경사스러운 일을 알릴 때에는 네 번 종을 치고 다시 쉬었다가, 연속으로 네 번 종을 치기로 한 것이다. 섯째, 장로와 집사들로 당번제를 실시해서 매월 1개월씩 돌아가며 교회 봉사 위원으로 활동하는 것이다. 이남규의 이러한 치밀한 목회 행정력과 진보적인 당회운영, 그리고 새신자 육성은 교회 성장에 크게 기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매우 진보적인 조치였다. 그러나 이남규의 목회가 꼭 밝은 면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1954년 “기장측 분열”이라는 새로운 상황에 직면하면서 그의 목회는 크게 흔들린다. 이남규는 분열된 제 43회 기장측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피선되는 중책을 맡게 된다. 그렇지만 이 분열에서 이남규는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그 후유증으로 목포노회는 반분되었으며, 교단 소속의 영흥학교와 정명여학교가 분리되는 아픔을 겪게 된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광복 이후의 이남규의 목회(목포양동교회, 노회와 총회 활동)는 시대적 상황에서 나름대로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제헌국회의원, 도지사, 참의원 등 일반인들이 쉽게 범접할 수 없는 괄목할만한 정치경력을 지녔음에도 교회 내에서 목사로서 독재를 휘두른 적이 없는 탈권위주의적인 목회활동의 모습을 보인 점은 참 목자로서 높이 평가받을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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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배 종 덕 (裵 鍾 德, Pai Chong-Duk)
- 1945년 8월 8일, 전남 목포시 창평동
15번지 출생
- 목포중앙초등학교(10회) 졸업
- 목포중·고등학교(중 15회, 고 13회) 졸업
- 연세대 정법대학 정치외교학과 졸업(1968년)
- MBC PD, ㈜제일기획(삼성그룹) 기획국장
- ㈜에스콤 대표이사 사장
- 통일민주당, 민주당, 신한국당, 한나라당 목
포시 지구 당위원장
- 13, 14, 15, 16, 17대 국회의원선거 입후
보(목포시) 당대표(이회창, 최병렬) 특별보좌역
- 민자당 문화예술위원회 부위원장
- 영·호남화합특별위원회 위원,
인재영입위원회 부위원장
- 현 지역주의 타파 범국민실천위원회 위원장
- 저서「나는 일하고 싶다」
「매향노라 불리운 사람」 출간
- 배종덕 7인의 휴먼다큐
「목포를 사랑한 사람들」 목포시민신문에
35회 연재 (2022년 6월 1일 ~ 2023년 3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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